“선생님, 억울해요. 애들 좀 혼내주세요!” 성호가 다급하게 교무실로 뛰어들어와 마구 소리를 질러댄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교사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분한 맘을 삭이지 못하고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는 성호에게 의자를 내주고 겨우 앉게 한다. 좋아하는 사탕을 줘도 받아놓기만 하고 입에 넣지 않는다.(사탕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사탕이나 초콜릿을 입에 넣고 있으면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학생들 당만 높여주어도 사고가 확 줄어들 거라는 농담 같은 말도 있다.)한참
추위가 매서운 계절이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오리털 외투를 덮어쓰고 책상에 딱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 세상의 온갖 아픔은 죄다 짊어진 듯한 얼굴로 추위를 타는 학생들을 보면 ‘추위는 차가운 바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허한 마음에서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구(가명)가 요즘 책상에 달라붙어 움직일 줄 모른다.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점심도 자주 거르려 한다. 점심시간에 빈 교실에 혼자 엎드려 있는 것을 겨우 달래서 식당에 보내는 일이 잦다. 수업에도 전혀 의욕이 없다.민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최근에 부모님이 자주
학년 초 준구(가명)의 표정은 몹시 어둡고 마음에 분노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첫마디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었다. “아버지가 싫어요. 얼굴 보기 괴롭고 무서워요. 저는 놀고 싶고, 체육 중학교로 전학 가서 높이뛰기 선수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소위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하세요. 학원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고 점수가 낮으면 나머지 학습을 시키는데, 이런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보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요.”준구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한번은 어지럽고 아팠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병원 다녀와서 학원 하루 쉬면 안
두 학교를 거쳐 우리 학교로 전학 온 범수(가명)가 우리 반으로 배정되었다. 학생들 말로는 두 학교를 평정한 일명 ‘짱 중의 짱’이다. 범수는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키는 170㎝ 정도로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며 다부진 몸매가 범상치 않았다. 특히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듣다가 뒤에서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 돌려 쏘아보는 눈빛에 학생들은 모두 기가 죽는다. 범수는 담임교사인 나에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나이도 다른 학생들보다 두 살 많아요. 이제는 정말 중학교 졸
수확의 계절 가을! 중3 학생들에게는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다. 중3 교사들은 행동발달과 종합의견에 좋은 내용을 찾아 써주기 위해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한다.나는 학기 초에 ‘장점 찾기의 생활화’란 주제로 자신의 좋은 점 찾기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들을 알게 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학교생활도 적극적으로 하고 표정도 밝아진다. 성적도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다. 장점 찾기를 잘하는 학급일수록 분위기도 좋다.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학생들에게 장점 찾기를 하자고 하면 무기력하게 있다가 “저는 장점이 없어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맑아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완연한 가을아침이다. 모처럼 창밖으로 북악산을 보며 철민(가명)이와의 일을 회상하는 여유를 가져본다.철민이는 일명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병원을 다니며 심리치료를 받고, 지금도 약을 복용하고 있다. 철민이가 1학년 때 참가한 가을 사생대회 및 백일장에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철민이는 이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은 전혀 쓰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고 물총에 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쏘고,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의 뒤를
15년 전 졸업한 제자들한테 연락이 왔다.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으니 참석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그때를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성열이(가명)는 한 학년 후배들과 친구를 맺고 생활한 추억을 회상했다.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며 나를 꼭 껴안기까지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당시 나는 1학년 담임이었다. 영국에 조기유학을 갔던 성열이가 6월 말쯤 우리 반으로 전학왔다. 초등학교 3학년 말에 떠나 그곳에서 초
노고단 산장의 아침은 일찍부터 분주하다.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리산 10경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노고단 운해는 장관으로 꼽힌다. 이를 보려는 기대감으로 산행을 서두른다.학생들도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우지 않았는데도 모두 일찍 일어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서로 조심하면서 부산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에 주변 청소까지 미리 나눈 각자의 역할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인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른 말을 잘 안 듣고
지리산 노고단 산장의 저녁은 무척 활기차다. 본격적인 종주를 앞둔 사람들의 기대감과 두려움, 호기심과 자신감이 어우러져 운동회날 분위기다. 저녁 먹고 산장 한쪽에 모여 앉았다. 한여름인데도 서늘하게 부는 바람과 총총한 별이 설렘을 더해준다. 서울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 같은 지리산 밤하늘의 별들을 신기한 듯 올려다봤다. 부모님 계신 서울 쪽을 향해 밤 인사를 드리라고 하였더니 방향을 잘 찾지 못한다. 평소 별자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두철이(가명)가 나섰다. “밤에 방향을 알려면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찾으면 된다.”두철이는
여름방학 첫날 학교에 모여 학생들과 지리산 종주길에 오를 때의 일이다.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까지 이동, 구례구역에서 버스로 성삼재휴게소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노고단 산장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더운 여름 날, 긴 시간 기차를 타고 와서 또 버스를 타고 올라와 바로 산행을 시작하면 몸이 적응하기 쉽지 않다. 산장으로 가기 전에 휴게소에 들러 몸풀기 체조를 하고 출발했다. 본격적인 산행도 아니고 비교적 걷기에 편해 보이는 전체 산행에 비해 긴 길도 아니지만, 짧은 시간에 고도
담임을 맡으면 ‘어떤 일을 함께하면 성장기 중학생들의 삶에 의미와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다 지리산 종주를 생각해냈다. 지리산 종주는 매우 매력적이다. 국내에서 가장 긴 종주 코스가 있어 해내기만 하면 의미도 있고 상징성도 크다. 학생들 스스로도 해냈다는 큰 자부심이 대단하다.아이들과 함께하는 지리산 종주를 계획한 후 사전준비를 꼼꼼히 했다. 나는 전문 산악인도 아니거니와 중학생들과의 종주는 예측불허의 시나리오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구해 읽어도 보고 등산광인 지인들에게 조언도 구했다.일반적으로 지리산
학생들과 오래전부터 함께 산행을 해왔다. 학기 중에는 주말이나 공휴일을 이용해 주변 산을 오르고 방학이면 설악산, 지리산 등 먼 산으로 산행을 하곤 했다. 서울에는 남산, 인왕산(仁王山), 북한산, 관악산, 수락산, 도봉산 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 많아서 좋다.졸업한 학생들이 종종 찾아오면 “중학생 때 산행이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을 준다”는 말을 많이 한다. 사회생활하면서 힘들 때나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산에 오르던 생각을 하면 위로와 위안을 받고 힘이 났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의 산행은 학생의 성장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아침부터 해야 할 일들이 쿨메신저의 알림 소리와 함께 날아들고 있다. 주로 선생님들이 시간 맞춰 함께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특히 생활기록부 기록은 신중하고 세심하게 살펴서 해야 한다. 출결, 성적처리, 자율활동, 봉사활동, 교과별 특기사항, 동아리활동, 창체활동, 종합의견…. 어느 하나라도 잘못 기록되거나 누락되면 안 되기에 재검 삼검까지 한다. 쿨메신저 알림 소리에 메시지를 열어 보니 3학년 박 선생님이다.“선생님~~ 기쁜 이야기가 있어 전합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승민(가명) 학생이 평균 19.8점이 올라 노력상을 받게 되었어
아침에 교실을 둘러보니 빈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범이’(가명)의 자리다. 조회를 끝내고 교무실에 와서 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통해 나오는 컬러링의 노랫말이“됐어 이제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이젠 족해 /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이 시꺼먼 교실…”.범이는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오는 것을 힘들어 했다. 범이의 부모님은 이혼 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범이의 양육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모양이다. 재혼한 아버지는 범이가 새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엄마와 생활
아침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데 쌀쌀한 바람이 들어온다. 밤새 기온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옷장에서 두툼한 외투를 꺼내다 보니 생각나는 학생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9월 초, 3학년 학생 여럿이 교무실에 와서 우리 반에 전학 온 학생이 없느냐고 묻는다. 다른 학교에서 강제 전학생이 우리 학교에 배정되어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이름은 다솜이(가명)라고 한다. 다솜이는 그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교칙을 어기고 후배 학생들을 여러 번 괴롭힌 것이 문제가 되어 우리 학교로 강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반의 학생 수
쉬는 시간, 학생들은 멀리뛰기 연습으로 바쁘다. 종례 시간에 멀리뛰기 챔피언을 뽑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에게 찾아와 확인까지 하고 간 ‘펄쩍이’는 유독 여유 있어 보인다. 멀리뛰기 우승자는 예상대로 ‘펄쩍이’가 됐다. ‘펄쩍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며 사진을 찍는다. 보는 나도 기쁘다.학기 초부터 2주에 한 번씩 학생들이 정한 종목으로 챔피언을 뽑아왔다. 일명 ‘모두 잘하는 올림픽’이다. 방식은 희망하는 학생이 종목을 제안하고 그 진행 방법을 설명하면, 2주 후 종례시간에 챔피언을 뽑아 시상식을 여는 것이다. 챔피언에
개학 날, 교실의 만냥금 화분에 새로 나고 자란 새싹이 아홉 개나 보인다. 두 달 전쯤 학생들과 함께 만냥금 열매를 따서 여기저기 화분 옆 빈자리에 꾹꾹 눌러 심어 놓은 것이 무더운 여름 빈 교실에서 홀로 싹을 틔우고 자란 것이다. 대견하고 기뻤다. 학생들도 몰려들어 신기한 듯 화분을 살핀다. 작은 화분에 심은 식물 중에는 말라 죽은 것들이 더러 있지만, 큰 화분에서 자란 식물들은 대체로 싱싱하다. 지난 겨울방학에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화분의 식물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많이 죽었지만, 큰 화분의 식물들은 비교적 싱싱하게 잘 자랐
귀갓길 버스 안, 뒷좌석 아주머니가 주말에 떠날 가족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평소 가족 여행을 싫어하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이번 속초 여행은 신이 나서 기다린다고 한다. 포켓몬고 게임 때문이다. “속초의 무슨 호텔에는 켄타로스인가 뭔가가 떴고, 속초 엑스포타워 쪽에는 망나뇽이 떴고, 미뇽도 뜬다”면서 포켓몬을 많이 잡아 자랑할 생각에 신나 있단다. 아주머니도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아들의 모습이 상상되는 듯 들떠 있다.본인이 바라는 일을 하면 즐겁고 흥이 난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도 절로 흥이 난다. 나도 그렇다. 학교에
학생들에게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의 지난 삶이 전반적으로 행복했다고 느끼는 사람, 지금 행복한 사람, 앞으로 행복할 것 같은 사람을 각각 손들어 보라고 했다. 앞으로 행복할 것 같다는 학생은 꽤 됐지만, 행복했거나 행복하다고 손을 드는 학생은 몇 명 되지 않았다.이번에는 질문을 바꾸었다. 무엇이 행복을 방해하는지, 어떤 일이 행복을 막을 것 같은지 물어보았다. 원인은 다양했다. 성적, 부모님 잔소리, 진로·진학, 그냥(이유 없이), 형제 사이의 관계, 이성 문제, 외모, 교우 관계, 경제력 등. 그런데 한
‘북한이 못 쳐들어오는 이유는 남한의 중2가 무서워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중학교는 예측불허의 시기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어디로 튈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의 문제로 학교에 방문한 부모들의 반응은 엇비슷하다. “우리 아이가 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이상하게 변했어요.” 자녀의 문제를 부모의 무관심이나 잘못된 양육방식이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오는 문제로만 돌리려는 부모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곡돌사신(曲突徙薪)’ 이야기를 해준다.곡돌사신은 ‘굴뚝을 구